수학계의 베토벤, 모두의 스승이 되다
- KOSMOS KSA
-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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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수학과 사랑에 빠지게 된 이유는 수학이 재고 정리에 도움이 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수학이 주는 기쁨과 만족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경이로운 정리들과 그것을 이끌어 냈을 때 느끼는 승리감과 놀라움, 인류 최고의 지적 업적을 경험하면서 감탄과 영광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언더우드 더들리, 드포대학 명예교수
때로는 우리가 어떠한 주제를 이해하려고 할 때 그 역사를 아는 것이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 어쩌면 수학이 그 예시가 될 수 있다. 수학적 대상의 탄생과 변천을 알게 된 사람은, 그 정의를 기계적으로 접한 사람보다 그 대상을 더 수학적으로 엄밀히 바라보고,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 대상들을 고안하고 개선한 수학자들에 대해 아는 것 역시 수학적 사고를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수학자들의 삶이 수학적 대상의 변천사와 다른 점은, 그들도 각각 하나의 인간이기에 우리에게 인문학적 영감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학문의 발전사는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고 인상적이기도 하다. 이것이 수학사의 매력이자 의의이다.
수학과 수학사에 관심이 많은 필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하고, 동시에 이미 관심이 있던 사람들을 지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여러 수학자를 중심으로 수학사에 대해 설명할 예정이다. 그중 이번 기사에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스위스의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를 다룬다. 만약 수학사를 부수적이거나 불필요한 주제로만 여겨왔다면 이 기사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럼 지금부터 오일러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도록 하자.

“오일러를 읽으라, 오일러를 읽으라, 그는 우리 모두의 스승이다.”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프랑스의 수학자)
How: 생애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는 1707년 4월 15일 스위스 바젤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 첫째로 태어났다. 독실한 종교 집안이다 보니 그의 아버지는 오일러가 신학을 공부하길 원했지만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던 오일러는 다른 과목들을 빠르게 공부한 뒤 나머지 시간에는 늘 수학 공부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그러자 당대 최고 수학자 요한 베르누이(Johann Bernoulli)가 직접 그의 아버지를 설득했고, 결국 그는 수학자의 길을 걷게 됐다.

요한 베르누이는 17~18세기에 걸쳐 여러 명의 걸출한 수학자와 과학자를 배출한 베르누이 가문 출신의 스위스 수학자로, 형 야코프(Jakob Bernoulli)와 함께 독일의 수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의 미적분학 발전에 공을 세우는 등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베르누이 가문은 오일러와 오랜 기간에 걸쳐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데, 이는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결국 13세 때 오일러는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인 바젤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바젤 대학의 수학 교수였던 요한 베르누이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며 남들은 10년 이상 걸리는 석·박사 학위를 6년 만에 마치고 졸업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렇게 오일러가 바젤에서 비교적 어린 나이에 남다른 수학적 재능을 드러내던 중, 북동쪽으로2,000km 이상 떨어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1725년 새로 설립된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PAH)에서 학자들을 찾고 있었다. 요한 베르누이의 아들인 다니엘과 니콜라스는 이미 여기에 몸담고 있었는데, 니콜라스가 사망하자 다니엘은 오일러를 공석이 된 교수직에 추천하였다.

이는 젊은 오일러가 학계에 진출할 기회였고, 그는 1727년 스위스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오일러는 바젤로 돌아간 베르누이의 뒤를 이어 수학 교수가 되었고 결혼도 하여 가정을 꾸렸다. 도약의 기회는 1740년 다시 한 번 찾아왔다. 페르시아의 왕인 프리드리히 대제(Fridrich the Great)가 라이프니츠가 설립했던 베를린 과학학회를 재결성하기로 결정했는데, 그곳의 높은 지위를 제의받아 수락한 것이다. 1741년 그는 베를린에 도착하였고 25년 동안 수학부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베를린에서 오일러는 380편의 논문을 준비하였고 그중 275편을 출판해내는 엄청난 작업량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제와의 관계는 영원하지 않았다. 둘 사이가 냉담해질 무렵 캐서린(Catherine) 여제의 요청으로 1766년 오일러는 베를린을 떠나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오는 도중에 그는 폴란드 왕의 초청으로 10일 동안 바르샤바에서 머물기도 했다. 이때 그의 나이 60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수학 연구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물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오일러는 태양을 많이 관측한 이유로 점차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천문학적인 작업량과 고령의 나이 역시 이에 한몫했다. 그렇게 그는1767년에 완전히 실명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은 이 시점에서 연구를 그만뒀을 것이다. 여태껏 쌓아온 명성과 명예, 재산은 여생을 살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달랐다. 눈먼 60대 노인이 된 그는 천부적인 기억력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연구를 계속하는 불굴의 투지를 보여주었고 이때 거의 매주 한 편의 논문을 냈다고 한다. 이런 그의 모습은 청각장애가 있지만 그에게 수학계의 베토벤(청각장애가 있었지만 수많은 명곡들을 작곡한 전설적인 작곡가)이라는 별명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그는 16년을 더 살았고 1783년, 칠판 앞에서 열기구의 상승 운동과 천왕성의 궤도에 대한 계산을 하다가 급성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3시간 후 세상을 떠났다. 바젤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를린 등 다양한 도시를 이동하며 수학이라는 학문에 헌신한 아름다운 삶이었다. 지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영면해 있다.
What: 남긴 것들
그의 생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그 어떤 수학자보다도 많은 단독 논문을 쓴 수학자이다. 실제로 그는 헝가리 수학자 폴 에르되시(Paul Erdős) 다음으로 많은 논문을 출판한 바 있다. 에르되시는 20세기에 활동했다는 점과 그의 대부분의 논문이 공동 연구임을 고려하면, 단독적으로 보았을 때 오일러는 역사상 가장 많은 논문을 출판한 수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만큼 그는 생산적인 연구를 지속했고, 수학에 큰 기여를 했다.
오일러는 당시 불완전했던 미적분학을 발전시켜 1748년 『무한해석 개론(Introductio in Analysis Infinitorum)』, 1755년 『미분학의 원리(Institutiones Calculi Differontial)』, 『적분학 원리(Institutiones Calculi Integrelis)』 등의 문헌을 출판하고 변분학을 창시하여 역학을 해석적으로 풀이하였다. 여기서 변분학이란, 함수들의 집합을 정의역으로 갖는 함수인 범함수를 다루는 미적분학의 한 분야로, 오일러는 베르누이 가문이 만든 미적분학의 근간 위에서 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오일러는 또한 매우 많은 개념과 기호를 수학에 도입하였다. 예컨대 함수, 자연상수 e의 개념을 고안하였으며, f(x), sin, cos, tan, Σ, i 등 수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자주 쓰이는 기호들을 도입하였다. 또한 자연상수 e와 역탄젠트함수의 멱급수 표현, 바젤 문제, 오일러 등식, 소수의 역수의 합의 발산, 페르마의 소정리, 오일러 지표(v-e+f), 오일러 근사 등 그 하나하나만으로 경탄할 만한 가치를 가지는 수학적 대상들을 연구하여 탁월한 결과를 도출해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한붓그리기 문제를 해결하고 그래프 이론의 기초를 마련한 것 역시 유명한 일화이다. 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다음 영상을 참고하길 바란다.
결론적으로 오일러는 미적분학, 해석학에서부터 그래프 이론, 그리고 응용수학까지 폭넓은 주제에 걸쳐 양과 질 면에서 모두 경탄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심지어 이들 중 상당수는 그가 실명한 이후에 해낸 것이다.
Why: 위대한 수학자가 된 이유
오일러는 현재까지 가우스, 푸앵카레 등과 함께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 중 하나인 오일러 등식은 1990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식으로 선정되었고(The Mathematical Intelligencer), 이 명예로운 수식어는 현재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위대한 수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 타고난 지능? 물론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의 너무나도 꾸준한 생산성과 무뎌지지 않는 수학적 감각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필자는 무엇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첫째, 지리적 조건이다. 오일러는 스위스 바젤 출생으로, 바젤은 당시 여러 면에서 활기찼던 도시였다. 스위스가 각국과 접하는 위치에 있었던 바젤은 교통, 무역의 요충지 역할을 했고,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바젤 대학이 세워질 만큼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 도시의 이름을 딴 바젤 문제는 역시 오일러가 해결한 난제로 유명하다. 바젤 문제란 자연수의 제곱의 역수의 총합을 닫힌 형식으로 나타내는 문제로, ‘바젤 문제’라는 이름은 이 문제를 수학계에 널리 알린 야코프 베르누이가 재직하던 바젤 대학에서 유래된 것이다. 바젤은 경제, 산업적으로도 스위스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렇게 많은 정보와 재화가 오가는 도시에서 성장한 오일러는 그가 가진 천부적인 재능 그 이상의 수학적 감각을 어릴 때부터 키울 수 있지 않았을까. 또한 바젤 대학에서 요한 베르누이로부터 수학을 배우며 그는 수학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흥미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에 초빙되어 이동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시 눈여겨볼 만한 도시이다. 러시아의 거의 유일한 유럽으로 향하는 부동항이며, 다양한 문화 유적이 있어 러시아의 문화 수도로 불리기도 한다. 이와 같이 각국에서 수도에 맞먹을 정도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도시들을 거친 오일러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더 깊이 있으면서도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치 오래전 활발한 교역을 통해 철학이라는 수준 높은 사고에 도달한 그리스인들처럼 말이다.
둘째, 오일러는 수학적 역량을 제한 없이 펼치기 좋은 시기에 활동했다. 그가 수학자로서의 연구를 시작한 시기는 뉴턴이 죽은 시기와 일치했는데, 그 당시 수학은 해석기하학과 미적분학의 개념은 갖추어져 있었으나 조직적 연구는 초보단계로 특히 역학, 기하학의 분야는 충분한 체계가 없는 상태였다. 해석학을 발전시킬 역량이 충분했던 그는 수많은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고, 동시대 그에 견줄 수학자가 크게 없었기에 그는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이 시대의 수학은 계몽주의와 결합하여 급격히 발전하고 있는 중이었고, 오일러는 이 흐름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그 결과 오일러는 18세기를 대표하는 수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셋째, 그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오일러 그 자신에게서 찾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초인적인 인내력과 끈기, 수학적 감각, 그리고 열정은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었다. 실명한 채로 매주 논문을 한 편씩 써냈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 수 있다.
나가며
지금까지 수학계의 베토벤이자 모두의 스승, 위대한 수학자인 오일러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의 일생은 후대 수학자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큰 귀감이 되었고, 또한 연구자로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한 가지 형태의 이상향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느끼는 바가 있다면 필자로서는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의 수학적 업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은 만큼 기대했던 독자는 실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족한 점들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또한 다음 기사에서는 더 알찬 내용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드린다. 이 기사를 통해 독자들이 조금이나마 수학사에 관심을 가진다면 나는 본연의 목적을 완전히 달성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읽은 모든 독자에게 감사드리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박규태 학생 기자 | 수리정보 | 지식더하기

참고자료
[1] 『신의 방정식 오일러 공식』, 데이비드 스팁, 동아엠엔비
[2] 『야밤의 공대생 만화』, 맹기완, 뿌리와 이파리
[3] 수학계의 베토벤, 오일러 [궤도 밖의 과학], https://weekly.donga.com/science/article
[4] 레온하르트 오일러 [Leonhard Euler],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
[5] 『현대 수학의 기원과 토대』, 지동표, 지식의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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