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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obert Oppenheimer의 삶과 과학자로서의 태도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삶을 둘러싼 쟁점과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과학의 의미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은 23년 개봉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 “오펜하이머”를 통해 전 국민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포스터
영화 오펜하이머의 포스터

영화에서는 3시간 안에 한 인물의 삶을 녹여내야 하므로 굵직한 사건들로 채웠지만 사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Oppenheimer)라는 인물의 내면은 들여다볼수록 심오하고 복잡하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는 오펜하이머의 말처럼 그는 수많은 사람의 구원자인 동시에 살인자이다. 인류의 미래를 결정짓는 막중한 결정의 책임자였던 만큼 그의 삶을 살펴보면 과학자로서 어떤 자세와 철학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최근 연구윤리가 사회적으로 대두되는 만큼 오펜하이머의 사례를 살펴보면 왜 그가 어떠한 결정을 하였고 이는 인류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따져보겠다. 뿐만 아니라 오펜하이머의 사적인 행보를 조사해보면 그는 사상과 여자와 깊고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자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오펜하이머는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나는 그의 삶을 전체적으로 소개하며 그의 삶을 평가하는 상반된 의견과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할 것이다.


우선 오펜하이머가 대학교수로 활동할 때까지의 과정에 대해 설명하겠다. 오펜하이머는 1904년 4월 22일 뉴욕의 한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광물 표본의 수집, 물리학, 화학, 문학에 깊은 관심을 들어냈으며 학업에서는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다. 이러한 그의 천재성은 대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925년 하버드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며 여러 우수한 학교와 연구소를 거쳐 괴팅겐 대학교의 막스 보른 아래에서 이론 물리학을 공부했다. 이곳에서 오펜하이머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를 포함한 20세기 물리학을 이끈 과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1926년부터 29년까지 무려 16편의 논문을 썼다. 이처럼 학업적으로 더 없이 뛰어난 그였지만, 이외의 활동은 상식을 벗어난 일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패트릭 블래킷을 독살하여 한 일은 그의 충동적이고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이다. 이러한 기행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는 그의 뛰어난 실력으로 여러 연구소와 대학교수를 거치며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아 나간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생전 사진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생전 사진

이때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좌우할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미국은 독일이 전쟁의 판도를 바꿀 엄청난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독일보다 먼저 이를 개발하기 위해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이렇게 탄생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최종 담당자인 그로브스 소장은 연구를 이끌어줄 적임자로 오펜하이머를 꼽았는데 그 이유는 권력에 약한 그의 태도 때문이다. 그와 동료의 천재성과 정부의 막대한 지원 덕분에 맨해튼 프로젝트는 1945년 8월,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 하지만 핵폭탄 개발 시작 당시 계획했던 폭탄의 피격지인 독일이 패망하며 폭탄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일본은 최후의 반격을 이어가고 있었으며 날마다 수천에서 수만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것이 첫번째 쟁점이다.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한 것은 정당한가?


일본에 투여된 리틀보이와 팻맨의 모습
일본에 투여된 리틀보이와 팻맨의 모습

먼저, 투하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가미카제 작전을 포함한 공격으로 인해 자국의 젊은이들을 계속해서 잃어가는 상황이었다. 오펜하이머도 한 명의 미국 국민으로서 자신의 친척이 될 수도 있는 군인들을 1명이라도 더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했다. 폭탄을 사용하면 곧 바로 전쟁을 끝낼 수 있으니 투하해야 한다. 하지만 폭탄을 투하하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총 2차례의 폭탄 투하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는 총 20만명에 이른다. 이 중 대부분이 민간인이며 3만명은 한국인이다. 무조건 항복을 위해 전쟁과 무관한 사람들을 희생시킨 것이다. 아무리 전쟁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인도적인 측면인 있어야 하지만 미국의 결정은 이를 침해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핵폭탄을 투여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주장도 신뢰성이 있다.


그렇다면 오펜하이머의 생각은 어땠을까? 오펜하이머는 일본 본토에 직접 떨어뜨려야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고 미의회에도 자신의 그런 의견을 밝혔다. 그는 폭탄 투하 임무를 책임진 장군들을 만나서 어느 정도의 고도에서 어떤 식으로 떨어뜨려야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할지를 설명하고 투하 방식을 지시하기까지 했다. 핵폭탄을 특히 히로시마에 떨어뜨리려는 이유도 두 도시가 평평하기 때문에 원자폭탄이 폭발해서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구석구석 관찰하기 좋았기 때문에 선정된 것이었다. 물론 오펜하이머는 핵폭탄의 살상력을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전쟁을 확실히 끝내는 것이 인명피해를 더 줄일 수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에 대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전쟁은 끝났지만 전 세계는 사실상 전쟁을 방불케 하는 대결, 긴장 상태가 유지되는 냉전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전쟁은 끝났지만 미국 정부는 더 강력한 폭탄의 제작을 계획한다. 전부터 아이디어는 제시되었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었던 수소폭탄이 그것이다. 초기의 수소폭탄 컨셉은 폰 노이만 과 스타니스와프 울람의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결과, 실제 핵융합을 일으킬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1951년 텔러와 울람은 성공 가능성이 높은 새로운 디자인을 제시하였고, 미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 아래 1954년 미국은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수소 폭탄의 개발에 매우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일반 자문 위원회 의장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수소폭탄 연구를 최대한 방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이 성공하자 반핵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던 오펜하이머는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1953년 12월 비밀정보접근 권한을 빼앗겼다. 이후 그는 '오펜하이머 청문회'로 보안 접근 권한 또한 빼앗기게 된다. 자신의 정보가 보호될 권리가 빼앗기고, 청문회 과정에서 치욕스러운 과거 사생활 또한 모두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것이 두번째 쟁점이다. 수소폭탄의 개발은 필요한 과정이었는가? 먼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당시 소련은 미국의 기술력을 바짝 뒤쫓으며 위협하고 있었다. 또한 강한 무기를 보유하는 것은 곧 전쟁이 일어날 경우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므로 더 많은 국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였다. 따라서 미국은 전략적인 이유와 전투력 과시, 일부 과학자들의 호기심을 이유로 수소폭탄 개발에 동의한다. 수소폭탄의 개발에 성공하며 소련과 영국, 프랑스를 포함한 다른 나라들도 연구를 이어 나갔고 우리는 핵융합 기술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수소폭탄의 개발은 정당하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말이 있듯이 더 강한 폭탄은 그것을 뛰어넘는 파괴적인 성능의 폭탄 제작의 기폭제가 될 뿐이다. 기술의 발전은 멈추지 않을 공개적으로 또는 비밀리에 국가들은 더 강한 무기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인류 보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며 첨단 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국가는 강대국에 더욱 의존하도록 유도한다. 인류 멸종 시나리오 중 하나가 핵폭탄, 수소폭탄을 사용한 세계 제3차 대전인 만큼 위험한 기술일수록 사전에 제지해야 한다. 당시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 의도는 과시의 목적이 다분하므로 이 연구는 정당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다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그렇다면 핵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는 어떠한 입장을 취하였을까?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 개발에 강력하게 저항했고 때문에 자신의 사생활이 모두 공개되는 치욕을 겪는다. 과연 수소폭탄의 개발은 핵폭탄과 무엇이 다르기에 반대하였을까? 그는 인도의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암송할 정도로 읽었는데 오펜하이머가 최초의 핵실험 직후 내뱉었다는 말 “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는 그 중 한 구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사고방식은 뼛속까지 물리학자이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특정한 주제에 대해 생각할 때, 외부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내재적 정합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한 일에 대해 당시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갖는 사회적 함의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후회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과학자로서 한 일이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것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미국이 핵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규제를 도입하려는 시도에 대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상 정치적으로 위험한 발언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까지 오펜하이머가 살아가며 겪었던 두 가지 중요한 쟁점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을 개발할 당시 국가를 위한 일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였다. 하지만 이후 수소폭탄의 개발이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그는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며 더 많은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과학의 발전은 개인적인 호기심, 국가의 압박, 경제적 이익 모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결국은 사람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바탕이 되어야 한다.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기술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또 기술은 인류의 삶을 윤택하고 평안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올바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오펜하이머의 삶은 과학의 의미와 모순점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가 어릴 때부터 관심을 가졌던 힌두교 경전에 따르면 트리무르티(삼주신)라는 신은 세 가지 모습(창조, 유지, 파괴)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그 본질은 하나의 신이다. 과학을 신에 대입하여 생각해본다면 과학은 어떤 것을 창조할 수도 있고 유지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파괴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이 과학이라는 학문에 종속된다. 우리가 창조라는 목적으로 기술을 개발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파괴의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으며 과학자는 이에 대해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자신의 기술이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된다면 막기 위한 활동을 펼칠 뿐만 아니라 평화 단체와 협력해 부당한 사용을 막아야 한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과학자로서 지녀야 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오펜하이머는 내가 생각하는 과학자로서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천재적인 두뇌로 전쟁을 끝낸 영웅이자 인류를 멸망시킬 무기를 만든 파괴자 오펜하이머, 과연 당신은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안건우 학생 기자 | 물리지구 | 지식더하기

참고자료


첨부 이미지 출처

[1] 유니버셜 스튜디오,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2] 나무위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사진

[3] AtomicNews NEWSLETTER, 06 원자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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