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선 회절로 밝혀낸 아스피린의 숨겨진 결정 구조
- KOSMOS KSA
- 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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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약물, 낯선 구조
시험 전날 밤, 머리가 지끈거릴 때 가방 속에서 꺼내 드는 하얀 알약. 혹은 감기 기운이 올라오던 날, 이불 속에서 자연스럽게 손에 쥐어졌던 이처럼 일상 속에서 익숙하게 마주하게 되는 이 약은 바로 '아스피린'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가정의 약 상자에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해 온, 이른바 ‘국민 진통제’.하지만 바로 그 익숙함 속에 숨겨진, 우리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과학적 비밀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의 약’이라고 믿어왔던 아스피린이 사실은 서로 다른 구조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같은 분자이지만 고체 상태에서 전혀 다른 두 가지 형태로 배열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번 이야기의 시작이다. 그러면 과연 같은 분자라도 그 구조가 달라지면 실제 약효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그것도 꽤 많은 변화나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그림1] 우리가 흔히 접하는 약 - 아스피린](https://static.wixstatic.com/media/b00e55_bdc1215cfd5f4b70b4df19ff1daa0012~mv2.jpg/v1/fill/w_612,h_408,al_c,q_80,enc_avif,quality_auto/b00e55_bdc1215cfd5f4b70b4df19ff1daa0012~mv2.jpg)
결정 구조란 무엇일까?
고체는 단순히 ‘단단한 상태’가 아니다. 그 안에서는 무수히 많은 분자들이 마치 블록처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격자 구조를 이루며 정렬이 된다. 이러한 3차원적 분자 배열을 우리는 결정 구조(crystal structure)라고 부른다.같은 화학식을 갖는 분자라도 배열 방식에 따라 열적 안정성, 기계적 특성, 광학적 성질, 그리고 무엇보다 용해도와 생체이용률에 이르기까지 물리적, 그리고 약학적 성질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예컨대, 결정 구조가 조밀한 경우에는 분자 간 상호작용이 강해져 열에 더 안정하지만, 동시에 물과의 접촉 면적이 줄어들어 용해도가 낮아질 수 있다. 반면 느슨한 구조는 물과 쉽게 상호작용할 수 있어 빠르게 녹지만, 습도나 온도 변화에 민감해 저장 안정성이 떨어질 수 있다.즉, 결정 구조는 단순한 입자 배치도가 아니라 약물의 효과를 결정짓는 약학적 정체성 그 자체인 셈이다.
아스피린, 단 하나의 구조는 아니다
우리가 오늘 다루고자 하는 아스피린의 정식 명칭은 아세틸살리실산(acetylsalicylic acid)이다. 이 분자는 본래 살리실산이라는 천연 물질에서 유래한 것으로, 독일의 화학자 펠릭스 호프만이 1897년 살리실산에 아세틸기를 붙여 위장 자극을 줄인 형태로 처음 합성에 성공했다. 그 후인 1899년, 제약회사 Bayer가 이를 세계 최초의 상표 등록 의약품으로 출시하면서 'Aspirin'이라는 이름은 현대 의약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림4] 최초로 아스피린을 합성한 펠릭스 호프만](https://static.wixstatic.com/media/b00e55_8a8af06e9881435e8cf8a4dd6441522b~mv2.jpg/v1/fill/w_197,h_256,al_c,q_80,enc_avif,quality_auto/b00e55_8a8af06e9881435e8cf8a4dd6441522b~mv2.jpg)
이러한 아스피린은 진통, 해열, 항염 효과에 더해, 혈소판 응집을 억제하는 작용까지 가져서 심혈관 질환 예방 목적으로도 널리 사용된다. 화학적으로는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이 물질이 고체 상태에서는 두 가지 완전히 다른 결정 형태, Form I과 Form II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이러한 구조적 이중성은 결코 아스피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화학식을 갖는 분자들이 고체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배열되는 현상, 즉 다형성(polymorphism)은 약물 개발과 제형 설계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다뤄진다. 이는 약의 성능, 작용 속도, 체내 반응성까지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실제로, 현재까지 상업화된 고형 의약품의 약 40% 이상이 다형성을 나타내며, 이들 중 상당수가 의도하지 않은 결정형의 등장으로 인해 개발 초기 단계에서 큰 어려움을 겪는다. 이는 아스피린이 보여주는 구조적 다양성이 그저 단순한 이론적인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구조를 읽는 눈 - X선 회절(XRD)
그렇다면, 이런 미세한 결정 구조의 차이는 어떻게 식별할 수 있었을까?그 해답은 바로 X선 회절 분석(X-ray Diffraction, XRD)에 있다. 이 분석법은 고체 결정에 X선을 쬐었을 때 원자 배열에 따라 특정한 패턴으로 회절되는 빛의 경로를 측정하여, 보이지 않는 분자 배열을 간접적으로 ‘보는’ 기술이다. 브래그의 법칙(Bragg's Law)을 이용하여 회절된 각도와 세기를 분석하면, 결정 내 격자의 간격과 배열 형태를 파악할 수 있다. 마치 그림자의 모양만으로 물체의 구조를 유추하듯 말이다.
이러한 XRD에는 두 가지 주요 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단결정 XRD(single-crystal XRD)로 하나의 결정 내 원자의 정밀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 고해상도 3차원 구조 분석에 유리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분말 XRD(powder XRD)로 다양한 결정이 섞여 있는 시료에서도 결정형 존재 유무와 상대적 분포를 판별할 수 있어 다형성 연구에 특히 유용하다.2005년, 실제로 Vishweshwar의 연구팀은 XRD 분석을 통해 아스피린 Form II의 존재를 처음으로 입증했다. 이 구조는 기존 Form I과 전혀 다른 회절 패턴을 보였으며, 때로는 두 결정형이 하나의 결정 안에 섞여 있는 intergrowth상태로 존재하는 경우도 관찰되었다. 이를 통해 고체 결정화 과정이 얼마나 정밀한 조건에 의해 좌우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림2] XRD (X-ray Diffraction) 분석 장치](https://static.wixstatic.com/media/b00e55_59d2318b77c54c21af3f570554de885f~mv2.jpg/v1/fill/w_690,h_690,al_c,q_85,enc_avif,quality_auto/b00e55_59d2318b77c54c21af3f570554de885f~mv2.jpg)
![[그림3] 결정에 X선을 쏘아서 얻은 회절 무늬 예시](https://static.wixstatic.com/media/b00e55_67e951d8a22f41f1b00ff35a6a469532~mv2.jpg/v1/fill/w_400,h_200,al_c,q_80,enc_avif,quality_auto/b00e55_67e951d8a22f41f1b00ff35a6a469532~mv2.jpg)
구조가 바꾸는 약효
그렇다면, 결정 구조의 차이가 실제 약효에도 영향을 줄까?단언컨대, 그렇다. 그리고 그 차이는 단순한 시간 문제가 아니라, 약물의 작용성과 안정성 전체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일단 약물의 효과는 어떠한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을까? 우리가 섭취한 약물의 효과는 단순히 어떠한 성분이 들어 있느냐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약물은 체내에 들어가 흡수되기까지 다양한 경로를 거치는데 이 과정에서 얼마나 잘 녹고 얼마나 빠르게 흡수되고, 또 얼마나 정확하게 표적에 도달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결정 구조는 민감하게 작용한다. 예를 들어 구조가 조밀할수록 물에 잘 녹지 않아 흡수가 늦어져 약효가 늦게 나타날 수 있다. 반대로 구조가 느슨하면 더 빠르게 용해되어 작용 시간도 짧아진다.이는 단순한 이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며 실질적이고 치명적인 사례로 이어진 적도 있다. 1998년, HIV 치료제 리트로나비르(Ritonavir)는 원래의 결정형이 아닌 새로운 다형체가 갑작스럽게 나타나면서 용해도가 떨어지고, 약효가 사라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해당 제품은 전량 회수되었고, 제약 업계는 다형성에 대한 통제를 새로운 핵심 과제로 삼게 되었다.
Form II - 더 나은 아스피린이 될 수 있을까?
구조에 따라 약효가 바뀔 수 있다면, 더 우수한 성능을 가진 결정형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 아스피린 Form II는 바로 그런 기대를 모으는 후보군이다.Form II는 Form I에 비해 더 빠르게 녹고, 더 우수한 저장 안정성을 가질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특성은 개량 신약, 속효성 제형, 고령자용 제형등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실제로, 의약계에서는 Form II 기반 제형 개발을 검토 중인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하지만 현실의 벽도 존재한다. Form II는 결정화 과정에서 재현성이 낮고, 기존 Form I과 쉽게 섞이기 때문에 순수 형태로 안정하게 제조하고 유지하는 것 자체가 큰 기술적 도전이다. 따라서 상용화 단계에서는 공정 제어 및 결정 공학 기술의 발전이 병행되어야 한다.현재는 Form II를 선택적으로 안정화할 수 있는 결정화 조건 탐색, 용매 시스템 제어, 시드 결정 활용 등의 연구가 진행 중이며, 이는 향후 약물 맞춤화 전략과도 깊게 연결될 수 있다.
마무리하며 - 익숙함 속 낯섦을 꿰뚫는 과학
우리는 아스피린을 너무나도 익숙한 존재로 받아들여 왔지만, 그 속에도 여전히 과학이 파고들 여지가 남아 있었다. X선 회절 분석은 이 단순한 약물 속에 숨어 있던 구조적 다양성을 밝혀냈고, 그 작은 배열의 차이가 실제 약효와 생체 내 작용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약의 효과는 단순히 어떤 성분이 들어 있느냐보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그 ‘존재 방식’을 읽어내는 일이 바로 과학의 몫이다.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접하고 있는 물질일수록, 어쩌면 그 안에는 더 많은 비밀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스피린의 또 다른 얼굴을 통해 우리는, 이미 안다고 믿었던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혹시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속에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얼굴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김서현 학생기자 | Chemistry & Biology | 지식더하기

참고자료
[1] Vishweshwar, P., McMahon, J. A., Oliveira, M., Peterson, M. L., & Zaworotko, M. J. (2005). The predictably elusive form II of aspirin.Journal of the American Chemical Society,127(48), 16802–16803. https://doi.org/10.1021/ja056455b
[2] Bauer, J., Spanton, S., Henry, R., Quick, J., Dziki, W., Porter, W., & Morris, J. (2001). Ritonavir: an extraordinary example of conformational polymorphism.Pharmaceutical research,18(6), 859–866. https://doi.org/10.1023/a:1011052932607
[3] A. D., Boese, R., & Desiraju, G. R. (2007). On the polymorphism of aspirin: crystalline aspirin as intergrowths of two “polymorphic” domains.Angewandte Chemie (International Ed. In English),46(4), 618–622. https://doi.org/10.1002/anie.200603373
첨부 이미지 출처
[1] (그림1) iStock
[2] (그림2) Anton Paar
[4] (그림4)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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