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냄새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KOSMOS KSA
- 7월 13일
- 3분 분량
촉촉한 빗방울이 대지를 적실 때면, 공기 중에는 특유의 향기가 퍼진다. 이 향기를 우리는 ‘비 오는 날의 냄새’로 기억한다. 사실, 이 익숙한 향기에도 과학적 비밀이 숨어 있다. 바로 ‘페트리코르(Petrichor)’라고 불리는 이 향은, 지구와 생명의 긴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자연의 산물이다. ‘페트리코르’는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페트리코르란 무엇인가?
'페트리코르'라는 용어는 1964년, 호주 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CSIRO) 소속 연구자 이사벨 조이 베어(Isabel Joy Bear)와 R.G. 토머스(R.G. Thomas)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Petrichor'는 고대 그리스어로 '돌(πέτρα, petra)'과 '신들의 피(ἰχώρ, ichor)'를 뜻하는 단어를 조합해 만든 것으로, 건조한 흙 위에 비가 내릴 때 발생하는 흙내이다. 비 냄새(scent of rain)라고도 한다.
베어와 토머스는 《Nature》지에 발표한 논문(Bear & Thomas, 1964)에서, 건조한 표면에 비가 내릴 때 독특한 냄새를 유발하는 물질이 암석과 토양 표면에 축적된 식물성 기원의 오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들은 특히 오랜 가뭄 이후 첫 비가 내릴 때, 페트리코르가 강하게 퍼진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향기의 주요 원인이 방선균(Actinomycetes)이라는 미생물이 생산하는 지오스민(geosmin)이라는 물질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지오스민, 페트리코르의 핵심 물질
지오스민은 퇴적토, 숲, 잔디밭 등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종의 휘발성 유기 화합물(VOC)이다. 흥미롭게도 인간은 지오스민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후각을 가지고 있어, 5조 분의 1이라는 극히 낮은 농도에서도 이를 감지할 수 있다.

지오스민은 주로 토양 속 방선균이 성장하거나 죽을 때 생산되며, 평상시에는 토양이나 식물의 표면에 고정되어 있다가 비가 내리면서 미세한 에어로졸 형태로 공기 중에 확산된다. 이 지오스민 분자가 코의 후각 수용체에 닿으면 우리가 "비 냄새"라고 부르는 특유의 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비가 향기를 퍼뜨리는 메커니즘
비가 떨어질 때 흙냄새가 퍼지는 과정은 단순히 '젖은 땅 냄새' 이상의 복잡한 물리적 메커니즘을 따른다. 2015년, 미국 MIT 연구팀은 고속 카메라를 이용해 비방울이 다공성 표면(흙, 모래 등)에 부딪힐 때 일어나는 미세 입자 방출 현상을 관찰했다.
빗방울이 표면에 닿을 때 작은 공기 방울이 토양 입자와 함께 표면에서 튕겨 올라가고, 이 과정에서 지오스민을 포함한 다양한 유기 분자가 공기 중으로 분산된다. 이를 '에어로졸 분사(aerosolization)'라고 부른다. 이 미세 입자들은 바람을 타고 퍼지며, 우리가 멀리서도 비 냄새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비가 약하게 내릴 때, 빗방울이 더 천천히 떨어지면서 입자들이 더욱 효율적으로 방출되므로, 천천히 내리는 이슬비가 강한 폭우보다 페트리코르 향을 더 풍부하게 퍼뜨리는 경향이 있다.
생태계에서의 페트리코르의 의미
페트리코르는 단순히 인간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곤충과 동물들도 페트리코르를 감지해 행동을 조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낙타는 사막에서 비 내린 지역을 냄새로 찾아내 이동 경로를 결정할 수 있으며, 일부 곤충들은 토양이 촉촉해진 곳을 찾아 번식지를 정하기도 한다. 심지어 일부 식물 씨앗은 지오스민과 같은 휘발성 물질을 감지하고, 발아 시기를 조절하는 신호로 삼을 수 있다. 즉, 페트리코르는 생태계 내 신호 전달 체계의 일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지오스민, 유익할까 해로울까?
지오스민은 인간에게 친숙한 향기를 제공하지만, 산업적으로는 종종 문제가 되기도 한다.
식수원이나 양식장에서 지오스민 농도가 높아지면 물이나 생선이 흙 냄새를 띠게 되어 품질이 저하된다. 따라서 정수 시설이나 양식업계에서는 지오스민 제거 기술 개발에 꾸준히 투자하고 있다.
또한 향수 산업이나 고급 음식 업계에서는 이 '비 오는 날 냄새'를 인공적으로 재현해 감성을 자극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오스민 농도를 정교하게 조절하지 않으면 쉽게 불쾌한 냄새로 변질될 수 있어, 상업적 활용에는 아직 한계가 존재한다.
과학이 풀어낸 감성, 페트리코르
비가 오기 전후에 느껴지는 그 짙고 푸근한 냄새는,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해 온 토양 미생물, 흙, 빗방울, 인간의 후각 수용체가 교묘하게 얽혀 만들어낸 과학적 산물이다. 우리가 비 오는 날 느끼는 감정은, 사실은 지구의 오래된 생명과 자연이 만들어낸 복합적인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비 오는 날, 우리는 단순히 향기로부터 오는 감상에 젖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향기 속에 숨은 과학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정이수 학생기자 | Chemistry&Biology | 지식 더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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